나의 과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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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천 이야기
  • 과천넷
  • 승인 2017.08.2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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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을 행복한 마을 공동체로

12년 전 과천으로 이사 오던 날 겪은 이야기다. 이사 짐을 옮기려면 곤도라를 실을 차량이 아파트에 바짝 붙여야 하는데 웬 자가용이 떡 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관리사무소를 통해 차량 소유주를 알아보니 바로 아래층이란다. 그 집에 벨을 누르고 차 좀 빼달라고 부탁했더니 그 집에 사는 어르신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대문도 열지 않은 채 “당신네 이사 오는데 왜 내 차를 움직여야 하느냐?”라는 말이 들렸다.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멀찌감치 곤도라 차량을 대고 위험천만한 이사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때 잘나가던 공직자 출신인 그는 은퇴 후 두문불출했다. 바로 윗집인 필자가 이사 오기 전 집수리를 하며 생긴 소음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고집이 좀 있어 보이지만 선량한 인상의 할아버지였다. 계단에서 인사를 꾸뻑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이사 온 지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궁금하다. 왜 그 날 할아버지가 자동차를 움직여주지 않았을까.

올해 과천시가 운영하는 시니어스쿨 강좌에 참여했다. 행복한 공동체의 삶을 이웃들과 함께 배우고 실천하는 매우 보람찬 과정이다. 보건복지부 공직자 출신인 박수천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사 온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과천주민들과 어울리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동네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노년의 행복을 생각하고, 텃밭도 일구며 교류한다. 인구가 적고 공원이 많은 과천은 시니어들이 살기에는 최고라고 생각된다. 양재천 중앙공원 대공원 일대와 관악산 청계산을 오르내리면 행복이 절로 찾아오는 느낌이다. 도서관이나 복지시설도 이만한 곳이 없고 서울을 오가는 교통편도 대만족이다.

과천 시니어스쿨에 다니면서 생긴 또 하나의 궁금증이 있다. 수강생 남녀 비율은 6대 4 정도 비율로 여성이 많다. 출석이나 수업태도는 여성이 훨씬 적극적이다. 독신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스스럼없이 어울리는데, 수강생 중 싱글 남성들은 아예 한 명도 없다. 그 많은 홀로된 남자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나이든 남자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흔히 여성들의 노후가 걱정이라고 한다. 대부분 아내가 남편에 비해 나이가 어린데 여성이 4~5년 더 오래 사니 남편과 사별 후 10년 정도 여성 혼자 살아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금전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리가 있다. 그런데 막상 노년의 어르신들을 보면 혼자서 살아가는 힘인 고독력(孤獨力)이 훨씬 중요한 것 같다. 남자들은 여성에 비해 혼자 남는 것을 두려워한다. 대기업 임원이나 잘나가는 공직자 출신일수록 퇴직 후 힘들어 하는 이유는 혼자 사는 훈련을 하지 않은 탓이다. 안타깝게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처럼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문득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 보다 4년 가까이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요리사이고, 대변인이고, 집사였다. 심지어 자식들도 아버지와의 소통을 어머니를 통해서 할 정도였다. 모든 것을 아내인 어머니가 다 챙기다 보니,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는 마치 적막강산에 혼자 남겨진 듯 했다. 사별 후 인생의 허무함을 탄식하던 아버지에게 돌연 우울증과 치매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겪었을 외로움의 크기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지금도 회한으로 남는다.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행복의 7개 조건은 성숙한 방어기제(스트레스를 극복하는 힘),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적당한 음주, 규칙적인 운동, 알맞은 체중 7가지를 들었다. 저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47세까지의 인간관계라고 했다. 인간관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혼자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싶다. 은퇴 후 30~4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가 은퇴하고 이렇게 오래 생존한 적은 없다는 사실, 그리하여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긴 외로움에 직면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라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다. 이제 체면치레 벗어던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근엄한 얼굴표정을 풀고 때로는 ‘적당히’ 망가져도 좋다. 고독력을 가지려면 자신만의 관심을 키우고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소일거리가 필요하다. 생활비가 모자라면 단 돈 몇 십 만원의 허드렛일이라도 하고, 여유가 있으면 취미나 봉사활동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것이 좋다. 인간은 일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도 배움에 대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배우자가 있더라도 독신인양 미리 연습하라고 권한다. 요리하는 즐거움을 배우고,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하고, 운동을 통해 노화를 늦추고, 홀로 여행하고, 자신에게 몰두하라고 한다.

그러나 고독력은 궁여지책일 뿐이다. “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라틴어로 행복을 뜻하는 ‘펠리시타스(felicitas)’는 ’더불어 행복‘이라는 뜻이다. 일정한 수준의 소득은 삶의 여유엔 필수적이지만 돈으로만 채울 수 있는 행복에는 한계가 있다. 행복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열정, 관심 같은 개인의 행복에는 돈 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행복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돈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다.

행복은 개인의 마음상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관계의 문제다. 행복은 구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한다는 얘기다. TV를 시청하거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이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행복감이 낮아진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정서적 인간관계에 기초한 관계재(relationship goods)가 아니고 기만적인 소비재일 뿐이다.

행복의 원천은 가족과 이웃이다. 별거에 따른 불행은 실직이 주는 고통보다 평균 5배나 더 심각하다고 한다. 그런데 가족은 항상 함께 살 수 없다.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척은 때론 이웃만 못하다. 신(神)은 전체 가구의 4분의 1 가까이를 독신 세대주로 만들어 놓고, 행복은 혼자서는 느낄 수 없도록 ‘교묘하게’ 설계해놓았다.

그 답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마을공동체 아닐까 싶다. 가족이나 일가친척은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고독력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노년의 삶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아랫집 할아버지가 자동차를 옮겨주지 않은 것과 과천 시니어스쿨에 남성들의 참여가 저조한 이유는 똑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마을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기대조차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직장에서 은퇴한 이후 모든 기대를 접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 아닐까.

과천은 ‘시니어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수한 사람들이 많고, 자연환경이나 복지시설이 앞선다. 이웃이 참 좋은 동네이자 제2의 고향인 과천에서의 멋진 노년인생이 기다려진다.

 

윤영걸 (10단지 거주/더스쿠프 편집인, 방송인. 전 매경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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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 2017-09-05 08:02:01
멋진 글입니다.

청관거사 2017-09-03 09:08:25
좋은 글 잘 읽고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리트윗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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