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둘러보기]2-추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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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둘러보기]2-추사박물관
  • 김세영
  • 승인 2017.11.06 22: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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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이룬 천재의 삶을 따라서

경기도 과천시 끝자락 주암동에 가면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생애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추사박물관이 있다.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에 위치한 추사박물관

추사는 1786년(정조 10년)에 태어나 1856년(철종 7년) 7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충청도 예산, 한양(서울), 중국 연경(베이징), 제주 대정, 함경도 북청에 이르기까지 67년의 시간을 보냈고, 과천에서는 겨우 4년을 지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추사박물관이 과천에 있는 이유는 박물관 바로 앞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찾을 수 있다. 

과지초당은 1824년 추사 선생의 친아버지인 김노경이 한성판윤 시절 마련한 별서(별장)이다. 지금은 주변지역 재개발로 인해 옛 모습을 알 순 없지만 약 200년 전에는 과지초당 주변 숲과 정원의 경치가 빼어났다고 한다. 명필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북학(北學) 계승, 청의 고증학 수렴, 금석학과 문자학 탐구, 시(時)∙서(書)∙화(畵)의 일체화, 예서(隸書) 연구, 추사체 창안까지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이뤄낸 천재 추사의 생애에서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 과지초당이다.

추사 김정희의 친아버지 김노경이 마련한 과지초당

추사박물관을 통해 천재 김정희 선생의 삶과 정신을 따라가 보자. 추사는 여덟 살 때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큰 집으로 들어간 후 친아버지 김노경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썼다. <추사가 8세 때 생부에게 올린 편지>를 보면 자신은 큰아버지 모시고 잘 지내고 있고 동생들이 잘 지내는지 묻고 챙기면서 제대로 갖추지 못해 살펴달라며 애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추사가 8살 때 친아버지에게 올린 편지

어린 시절에는 중국 연경에 다녀온 북학파 박제가(朴齊家)의 가르침을 받고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학문에 호기심으로 연경을 꿈꾸며 시를 짓기도 했었다. 시에는 세상 밖 사람들을 사귀고 싶다며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목숨을 내줄 수도 있다고 썼다. 드디어 만나고 싶었던 청나라 고증학자의 대가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연경에서 만난 추사는 글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전하고 마음을 열어 제자가 되었다.

김정희 옹방강 필담서

추사가 청나라와의 학문 교류에 쏟은 열정과, 그의 학문이 청나라에서 얼마나 인정받았는 지는 청나라 학자 정조경(程祖慶)이 추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 <문복도捫腹圖>를 보면 알 수 있다.

문복도, 관을 쓴 노인은 김정희이고 손을 잡고 공손히 서 있는 사람은 정조경 자신이다.

청나라 금석학을 공부한 추사는 벼슬도 미루고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옛 비석들의 글씨를 조사했다. 1816년에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했고, 공부를 계속해 이듬해 판독을 완료했다. 24세(1809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1819년 34세에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던 추사가 1826년 암행어사로 파견된 충청우도에서 임금께 올린 보고서의 공적을 기린 <어사김정희영세불망비>는 현재 서산에 남아 있다. 1840년 55세가 된 추사는 정치적 모함을 받아 9년 가까이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유배 생활 중 부인 예안 이씨에게 쓴 한글 편지에는 부족한 옷과 음식, 잦은 병치레 등 유배 생활의 어려움과 부인에 대한 그리움, 자식 교육에 대한 고민 등이 구구절절이 담겨 있다.

제주도 유배 시절 부인 예안이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

1844년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린 세한도(歲寒圖)의 화풍과 뒤쪽에 쓴 글의 굳센 필치에서 힘든 유배생활을 이겨내려는 고고한 선비 정신과 의지가 엿보인다. (세한(歲寒)은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후조"(歲寒然後知松栢後凋)의 첫머리를 따서 지은 것으로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뜻).

세한도

1849년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 용산에서 지내다가 다시 모함을 받아 함경도 북청에 1년간 유배됐던 추사는 함경감사로 온 후배 윤정현과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해 원래 자리로 옮긴 뒤 <진흥북수고경>이라는 현판을 썼다. 

1852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드디어 친아버지 김노경가 생전에 과천에 마련했던 과지초당에서 지냈다. 과천 시절 추사의 편지에는 노년의 단조로운 일상과 심정이 많이 담겨 있다. 꾸밈없는 글씨체로 쓴 <조카 민태호에게 보낸 편지>에는 추사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느껴진다.

추사가 조카 민태호에게 보낸 편지

추사는 명문가 후손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친부모를 떠나 큰 집의 양자가 됐고, 젊은 시절엔 원하는 학문을 마음껏 탐구했고, 벼슬도 해보고, 나이 들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지에 갇혀 있었다. 말년에 과지초당에서의 삶은 조용했다. 

오늘날 추사는 학문과 예술의 일치, 글씨와 그림의 일치, 화풍과 인품의 일치를 이룬 천재로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1856년 작품 <벼루 열 개, 붓 천 자루 써 버리며>를 보면 스스로 70년 평생 벼루 열 개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는데도 자신의 글씨가 말할 것도 없다고 한다.

벼루 열 개, 붓 천 개를 써 버리며

이처럼 추사는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추사가 유명해지겠다는 마음을 먹고 작품들을 남긴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추사는 긴 세월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었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고 선비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과천은 추사가 태어난 곳도, 유배 당했던 곳도 아니지만 죽기 전 4년 동안 지낸 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추사박물관까지 지어지게 됐을까. 추사 관련 자료는 2006년 과천시에서 주관한 추사 서거 1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위해 김정희 선생을 연구한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에게 연락해 기증을 받아낸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추사박물관은 2009년 6월 착공돼 2013년 6월에 개관했다.

추사박물관에 가면 추사가 꽃피웠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알 수 있다. 추사박물관에서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수시로 운영하고 있다. 추사 관련 학술대회 및 행사도 수시로 열리고 있다. 추사체라는 말은 유명하다. ‘추사’하면 ‘김정희’라고 대답하는 유치원생도 있다. 아쉬운 건 그의 글씨체에는 관심이 높지만 정작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추사 선생이 시와 글과 그림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추사 선생이 살았던 과천의 시민으로서 그의 삶을 이해하고 그 작품 속에 담겨 있는 곧은 정신과 굳은 의지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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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효 2017-11-08 10:32:03
깊이 있는 취재 좋습니다

카이 2017-11-07 01:00:26
대작 기사군요!!

해원 2017-11-06 22:15:39
과천넷의 깊이있는 심층취재기사 정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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