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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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실종
  • 최성범 기자
  • 승인 2017.10.09 06: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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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츠런 파크라는 지명이 있다. 렛츠런파크(Let's Run Park)라는 이름만으로는 아마도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원일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알고 보면 경마장의 바뀐 이름이다. 개명의 의도가 뭔지는 알 길이 없어도 경마장을 연상하기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마사회가 지하철 4호선 경마공원역 명칭도 렛츠런파크역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국토교통부에 제시한 적도 있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홈쇼핑 채널을 돌려보면 영어 세상이다. “이 재킷은 고트 스킨으로 만들어졌고요, 칼라는 브라운 화이트 블랙 세 가지에 올 사이즈입니다.” “모든 옷을 시즌리스로 만드는 매직아이템입니다. 니트 안에 원피스를 레이어드했어요.” 어느 나라 방송인지 무슨 내용인지 알기 어렵다. 멀쩡한 한국어를 두고 굳이 영어를 쓰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래야 매출이 오르는 것일까? 화장품 광고에는 안티에이징, 더마에센스, 리커버파운데이션, 더마데이션, 뷰티파우치 등 영어가 난무한다. 어느 카드 회사 TV광고에는 ‘익스클루시브’, ‘슈퍼콘서트’, ‘컬처프로젝트’, ‘트래블 라이브러리’, '디자인라이브러리', '하우스오브더피플‘ 등 1분 남짓 짧은 시간에 영어 단어가 마구 쏟아져 나와 해석하기에도 바쁠 지경이다. 오죽하면 방송광고 중 외국어 사용시간이 절반 이내로 제한하라고 방통심의위가 권고를 했을까?

 서울시의 외국어 사랑은 유명하다. 시니어패스, 어반테라스 등은 이미 여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10월중 예정돼 있는 행사 중 서울뮤직시티커넥션, 서울미술관 뮤지엄 나이트, 원모어트립 등의 명칭엔 기가 찰 지경이다. 서울 지하철 전동차 출입문 앞에는 ‘출입문에 기대지 말고 버스킹플레이에 기대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길거리 공연 안내문인데 굳이 버스킹 플레이라는 영어를 써야 할 이유가 헷갈린다. 서울시가 주최한 마라톤 행사의 명칭은 ‘We Run Seoul'이었다. ’서울을 달린다‘가 아니라 ’서울을 운영한다‘로 번역하는 게 아마 제대로 된 번역일 것이다.

 10월9일은 한글날이다.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등과 함께 5개의 국경일 중의 하나다. 한글날은 2005년도에 국경일로 지정됐다. 국경일 가운데 3ㆍ1절, 제헌절, 광복절은 알고 보면 지난 20세기에 국한된 사건일 뿐만 아니라 광복절을 제외하곤 역사적 평가도 엇갈려 굳이 국경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반면 한글날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한글이 제정된 날인만큼 그 의미는 각별하다. 한글이 없었다면 한민족도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문화시대일수록 민족보다는 문자의 중요성이 커진다. 언제부턴가 한글날이 되면 한글의 우수성이나 한류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이처럼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분위기 속에 한국 사회는 외국어 홍수 속에 휩쓸려 가고 있다. 물론 글로벌 시대를 맞이해 외국에서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외래어도 유입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어가 범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멀쩡한 우리말을 두고 외국어를 쓴다는 점이다. 그 의미를 살려 작명하는 중국과는 대조적이다. 외국 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인지는 몰라도 상업주의와 교묘하게 결합돼 영어가 설쳐댄다. 한마디로 한국어의 실종이다. 어느새 꽃은 플라워로, 결혼은 웨딩으로, 옷은 드레스로, 요리사는 세프로, 미용은 뷰티, 엄마는 맘으로, 아침은 모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어가 사라지고 영어가 한국어를 대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기에 앞서 모국어인 한국어를 지키는 게 급선무다. 

 이는 한국 국민 전체가 외국어 명칭이나 단어에 새롭고, 품격 있으며 신뢰성이 높다는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간 영역에서 광고 문구에 외국어를 과다 사용한다고 해도 법으로 막을 수도 없는 일이라 사실 대책이 없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선 다르다. 대한민국 표준어는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표준어로서의 한국어는 단순한 관습 그 이상이다. 정부가 규정을 통해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문화관관광부 소속 국립국어원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나 공공 단체는 법령, 공문서 등에 표준어를 사용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들도 민간기업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이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추세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새로운 정책의 명칭을 보면 뉴스테이, 뉴타운, 핀테크, 뉴스타트, 로컬푸드, 룸세어링, 스타트업, 코리아세일페스타 등 정책 명칭을 영어로 명명하는 게 유행이다. 한글로 표기했을 뿐이지 외국어다. 한글문화연대가 17개 정부부처가 올해 4~6월 중 보도자료 2728건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사례가 8831건으로 건당 3.1회에 달했고, 외국어 남용은 1만9312건으로 보도자료 한 건당 무려 71회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앞장 서서 한국어를 홀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외국어 남용에 가장 앞장서는 집단은 영향력이 큰 방송사들이다. 영어가 들어가지 않은 방송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힘들다.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어다.

 싱글와이프, 오마이베이비, 마이리틀텔레비전, 모닝와이드, 뉴스타임, 스포츠매거진, 배틀트립, 해피투게더 등 오락 프로그램은 영어명칭이 이미 대세다. 뉴스프로그램에선 ‘타임’, ‘데스크’, ‘하이라이트’, ‘나이트’의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공영방송인 KBS의 다큐멘터리 명칭에서도 어처구니 없는 영어가 쓰일 것을 발견하고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코리언지오그래픽, 피시, 누들로드, 헌트 등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는 외국어를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게 관행화되고 있다. 한국어를 쓰면 시청률이 오르지 않을까? 방송가에선 프로그램 명칭을 우리 말로 지으면 감각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방송프로그램에서 영어사용비율이 최근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방송통신심의위의 방송언어특별위 보고서에 따르며 불필요한 외래어 외국어 제목을 사용한 프로그램이 26.9%에 달했다. 방송이 공공재라는 사실을 거론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공중파가 이러니 케이블방송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방송출연자들도 영어를 많이 사용해야 수준 높은 출연자가 된다는 듯 외국어 남용이 대세다. 뮤지션, 아티스트, 콜라보, 세션, 케미 등 영어를 써야만 높은 수준을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듯 국어 파괴에 앞장선다. 가수, 예술가, 협업 등의 용어는 거의 사어(死語)가 되어 가고 있다. 외국 영화 명칭은 번역하지 않고 정체불명의 원어 그대로 하는 게 관례가 된지 오래됐다.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한국어 표준어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외국어 남용을 지금처럼 방기할 경우 어느 순간 표준어로서의 한국어는 그 설 자리를 잃고 만다. 한국어가 실종되면 한글도 당연히 실종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도 실종될 수 있다.

 한국의 실질문맹률이 OECD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글을 알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게다가 나라 전체가 한국어 홀대에 나서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가 한국어와 한글을 포기하려는 듯한 현실 속에서 공휴일에 불과한 한글날이 또 지나간다. 

발행인 최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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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 2017-10-09 09:02:44
세종대왕께서 오늘 이 현실을 보신다면
"내가 이 꼴 보려고 한글 맹글었나 ?"
탄식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글, 한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지켜 줄까요 ?

오래어 쓴다고 유식한 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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