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칼럼] 떠나는 메르켈의 그 '너무 좋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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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칼럼] 떠나는 메르켈의 그 '너무 좋은 얼굴'
  • 과천넷
  • 승인 2021.12.0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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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일로 16년의 독일 총리 생활을 마감하는 앙겔라 메르켈에게서는 두 가지 모습이 겹친다. 
그 하나는 동네 구멍가게의 마음씨 좋은 주인 할머니처럼 수수한 얼굴이고 다른 한 모습은 유럽 최강국가로 부상해 ‘제4제국’이라는 경탄과 경계의 대상이 된 독일의 여황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새삼 독일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여성 지도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여왕은 그만두고 여성 총리도 메르켈이 최초였다.
영국이 16세기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대영제국의 출발을 알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19세기에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장식한 것도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독일과 뿌리가 같은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18세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같은 여걸을 배출하기도 했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왕이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공식 황제는 여성이라 해서  될 수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황제 같은 황후였기에 곧잘 여제로 표기되곤 했다.
그도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에 버금하는 명군으로 꼽힌다.
막상 독일 출신의 여성으로는 독일이 아닌 러시아에서 황제로 이름을 날린 예카테리나 2세가 눈에 띈다. 표트르 3세의 황후였던 그는 1762년 궁정 혁명을 통해 남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키고 제위에 등극하여 1796년까지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 역시 명군이어서 이방인임에도 ‘대제’로 기록된다. 
그래서 동양을 살펴보면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악명이 높지만  명군이라는 평가도 높다.
 그러고 보면 여성 통치자는 명군의 소질이 다분한 것 같다.
물론 앙겔라 메르켈은 이런 역사상의 여걸들과는 호칭부터 궤를 달리한다. 그 여걸들이 백성위에 군림하는 군주라면 메르켈은 국민의 신하인 ‘수상(首相)’이나 나라의 큰 머슴 격인 ‘총리(總理)’라는 호칭으로 시종했다.
그는 현대사에서 명성을 날린 여성 지도자들과도 다른 인상이다.
현대사에서 이름을 날린 여성 지도자라면 흔히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1969~1974)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1979~1990)를 떠올리며 이들은 ‘철의 여인’이라는 ‘애칭’을 공유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골다 메이어가 먼저 철의 여인이 됐다가 그가 사망한 뒤에 집권한 대처가 그 별명을 물려받은 셈이다.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력히 대처해 이스라엘에서는 위인 같은 인기를 누렸으나 아랍인들에게는 유태인들의 눈에 비친 아돌프 히틀러에 못지않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는 아랍인들의 그런 시선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랍인은 물론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했던 세파라딤이라는 유태인들도 경멸했다. 하물며 흑인이나 황인종 유태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편 대처는 1982년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해 기염을 토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다면 그도 스페인과 같은 핏줄의 아르헨티나를 물리쳐 더욱 상징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다.
그런 업적이 대처를 엘리자베스 1세처럼 돋보이게 했으나 그가 노조를 와해시키고 독단적인 정책을 펼치며 유럽 통합에 반대하자 그에게 골다 메이어가 남기고 간 철의 여인이라는 호칭이 씌워지게 됐다.
 메르켈은 그들처럼 과격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은 채 더 큰 업적을 남긴 셈이다. 그는 16년간 조용하고 평범하게 통치하면서 어느 새인지 2차 대전에서 패해 사라진 제3제국과는 딴판의 경제대국인 제4제국을 이룩한 셈이다.
물론 그에게도 ‘철의 여인’ 비슷한 비난이 없지 않았다. 그리스 경제 위기 당시 그는 그리스에게 내핍생활을 강요했고 이에 반발한 그리스인들이  메르켈의 얼굴에 히틀러의 코밑수염을 합성한 사진이나 만평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 한편에서 독일을 히틀러의 제3제국에 빗대어 ‘제4제국’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부패와 실정으로 야기된 것이기에 그런 비난은 설득력이 없었다.
독일을 ‘경제 제국’으로 비난한 것도 허튼 소리 이상의 위력은 없었다. 독일이 그런 경제를  쌓는 과정에서 이렇다 할 불법을 저지른 바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메르켈에게는 큰 자산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얼굴’이다.
그 얼굴이 유난히 예쁘거나 특색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아니, 특색이 없이 평범한 얼굴이어서 큰 자산이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평범하면서도 친근하다는 정도다.
그런 것이 정치인에게 무슨 자산이란 말인가. 정치인이라면 여성이라도 메이어나 대처처럼 서슬이 퍼래 보이는 면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니 여성이니까 더욱 날카롭고 강력해 보여야 되는 것 아닐까?
그것은 쉬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메르켈의 그 친근한 얼굴이 바로 독일에게는 커다란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게는 유태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빚이 지워져 있어서다.
 독일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이스라엘 등에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한 것 외에도 엄청난 사죄의 노력을 해왔다.
바로 메르켈이 2008년 이스라엘 건국 60주년을 맞아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세트에서 독일 총리로써는 처음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역사적인 책임을 진다. 이는 독일이 존재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부족한 데가 있다. 많은 세계인들이 독일인들을 살인광이나 잔인한 민족으로 보는 시선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시선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의 유태인 위령탑에 헌화하던 중 무릎을 꿇은 것으로도 쉬이 거두어 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마당에 16년간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나 할머니 같은 얼굴이 ‘독일의 얼굴’로 구실한 것은 독일을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서나 너무 행운이었다.
그 얼굴은 브란트처럼 유태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독일인들을 변호한 셈이다. 
 그런 ‘독일의 얼굴’을 보면서 사람들은 너무 당연하면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 또 다른 사유에 접할 수 있다.
 “독일인들이 딱히 다른 유럽인들보다 더 악한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유태인을 싫어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었던가? 나치가 현지인들의 협력이 없이 어떻게 숨어 있던 유태인들을 찾아냈단 말인가?”
메르켈의 그 얼굴은 마지막까지 친근함을 잃지 않았다.
그가 4일 총리로써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당부한 것은 고작 백신을 맞으라는 것이었다.
 2006년 6월 대국민 팟캐스트를 시작한 뒤 15년간 600회에 걸쳐 국민들과 직접 소통해온 그가 4일 마지막으로 출연한 팟캐스트는 코로나19의 신종변이인 오미크론의 전염성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으니 마지막 치고는 다소 무드 없는 팟캐스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당부야 말로 메르켈다운 고별인사였다. 
그 끝에 지난 16년간 독일이 걸어온 영광의 발자취를 회고하면서 눈시울을 붉힌 것은 메르켈 16년의 화룡점정이었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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